해외입양, 상처로 남은 ‘구원의 이름’1. ‘구원’이 아닌 ‘포기’였던 선택 1950년대, 한국전쟁은 나라를 초토화시켰고 수십만 명의 고아를 남겼다. 정부는 절박한 현실 속에서 해외입양을 선택했습니다. 초기에는 "전쟁 고아를 구한다"는 인도주의적 명분이 강조되었고, 세계 각국은 한국 아이들을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해외입양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국가 차원의 복지 포기와 외화 수입의 수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1970~80년대, 한국은 세계 최대 해외입양 수출국이었습니다.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고아 수출국'이라는 비판을 받은 사실은 해외입양 정책의 민낯을 드러낸 것입니다. 양부모를 찾아야 할 일부 아이들은 출생 기록이 조작되고, 친생부모와의 재결합 기회조차 빼앗긴 채 타국으..